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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스승이었던 신돈은 어쩌다 참수당했나?

by 미쿡스트릿맨 2023.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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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스승이었던 신돈은 어쩌다 참수당했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신돈, 그는 왜 제거 되었나?

안녕하세요. ^_^

미쿡스트릿맨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주제는 바로, 고려 공민왕 시설에 매골승에서 최고의 권력 중심에 선 신돈의 이야기를 해 볼까합니다.

 

매골승이었던 신돈

신돈은 원래 매골승이었습니다. 매골승은 조선시대에 전쟁이나 기근으로 길에서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을 때, 바라보기조차 힘든 광경 속에서 죽은 백성들을 수습해 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고려시대 승려는 종교인이자 의술 천문 풍수 등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전문인이었습니다. 병자들이 치료를 위해 의술이 뛰어난 승려를 찾기도 했습니다. 신돈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활동하였고, 그의 경험과 능력이 공민왕에게 인정받아 정치의 중심으로 불러들여졌습니다.

 

신돈(辛旽, 1323년 1월 21일 ~ 1371년 8월 21일)은 고려 말의 승려 출신 정치가였습니다. 그의 법명은 편조(遍照)로, 신(辛)은 속성이고 돈(旽)은 환속(還俗)하고 나서 바꾼 이름이었습니다. 신돈은 경상도 영산현(現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신돈의 어머니는 노비출신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출신을 따르던 제도에 따라 신돈은 노비 출신이었던 것이죠. 어려서부터 승려가 되어 각지를 방랑하였습니다. 그는 승려로 살면서도 신도를 신분에 따라 차별 대우하지 않아 신도뿐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칭송받았고, 개경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습니다.

 

정치의 중심에 선 신돈, 결국 처형되다

공민왕에게 등용되어 환속 후 1365년(공민왕 14년)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와 감찰사판사(監察司判事)와 서운관판사(書雲觀判事)를 겸직하였습니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토지를 농민에게 보급하고 양인(良人)이 노비가 된 자들을 석방시켰으며 성균관을 중건(重建)하고 공자를 국사(國師)로 격상시키는 개혁정책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반발과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낀 공민왕에게 제거되었습니다. 그 뒤 1371년 7월 수주(水州)로 유배되었다가 역모를 꾸민다는 익명으로 된 투서(投書) 탓에 참수되었습니다.

 

신돈과 공민왕의 관계는

 

신돈과 공민왕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습니다. 신돈은 공민왕 14년 (1365)부터 20년 (1371)에 이르는 6년 동안 정권의 핵심인물로 활약했습니다. 공민왕은 신돈이 여타 신하와 달리 파당에 속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리사욕이 없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여 신돈을 전면에 내세우고 적극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신돈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세력이 형성되자 공민왕은 신흥무인세력과 권세가들을 견제하려 신돈을 내세우게 됩니다. 신돈은 공민왕의 힘으로 기존의 권력구조를 바꿨고, 신진사대부들이 진출할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렇게 쓸모를 다한 신돈은 권력에 집착하게 되면서 공민왕의 경계를 받고 끝내 역모혐의로 처형됩니다 신돈이 주도했던 공민왕대의 개혁은 권문세족의 반발에 의해 실패하였고, 그의 실각 후 4년만에 공민왕이 피살됨으로써 개혁은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신돈에 대한 평가는

신돈의 평가는 다양합니다. 그의 개혁정책은 고려시대의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농민에게 토지를 보급하고, 양인이 노비가 된 자들을 석방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그 시대의 사회 구조를 바꾸려는 대담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권문세족의 반발을 샀고, 결국 그는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개혁정책은 대부분 폐기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그를 고려시대의 개혁가로 보며, 그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그의 개혁이 실패로 끝났다는 점, 그리고 그가 권력을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전민변정도감에 대해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은 고려 후기의 개혁 기관으로, 권문세족이 토지와 노비를 늘려 국가 기반이 크게 악화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특별기구였습니다. 

 

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에 토지 침탈과 백성의 궁핍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1269년에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이후 1288년, 1301년, 1352년, 1366년, 1381년, 1388년에도 역시 토지와 백성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 반복해서 설치되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폐지되었습니다.

 

공민왕은 1365년에 신돈을 등용하여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신돈은 가뭄 때문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설치한 형인추정도감을 확대하여 1366년 5월에 전민추정도감으로 개편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토지와 노비에 대한 개혁을 통해 국정을 장악하려는 의도였습니다¹. 하지만 신돈의 실각과 공민왕의 친정 주가 이어지면서 전민변정도감의 활동은 판도사, 도관 등으로 이관되어 해체되었습니다.

 

 

신돈은 실제로 역모를 꾸몄나?

신돈의 역모혐의 신돈이 역모 혐의로 처형된 근거는 익명으로 된 투서(投書) 때문이었습니다. 이 투서는 신돈이 공민왕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투서가 누구에 의해 작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내용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신돈의 권력이 커지면서 세력이 형성되자, 공민왕이 신흥무인세력과 권세가들을 견제하려 신돈을 내세우게 되었고, 신돈이 권력에 집착하게 되면서 공민왕의 경계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투서가 신돈을 제거하기 위한 구실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공민왕의 아들 모니노(우왕)의 생모, 반야에 대해서

반야에 대해서 반야(般若)는 고려 공민왕의 후궁으로, 우왕(모니노)의 생모였습니다. 그녀는 원래 신돈의 노비 출신이었으며, 그녀가 신돈의 노비였던 것을 걱정한 공민왕은 그녀의 아들 모니노의 혈통 시비를 예상하여 모니노를 궁인 한씨의 자식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왕 즉위 후 반야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우왕이 자신의 아들임을 주장하다가, 명덕태후와 이인임 등에 의해 임진강에 수장되었습니다. 그녀의 정확한 가계는 알 수 없습니다

 

신돈의 개혁 정치

  • 토지 개혁 :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를 농민에게 보급하였습니다. 이는 그 시대의 불평등한 토지 소유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였습니다.
  • 노비 석방: 신돈은 양인이 노비가 된 자들을 석방시켰습니다. 이는 그 시대의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 교육 개혁: 신돈은 성균관을 중건하고 공자를 국사로 격상시켰습니다. 이는 그 시대의 교육 체제를 개선하려는 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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