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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욕망을 채운 십자군 전쟁

by 미쿡스트릿맨 2024.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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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욕망을 채운 십자군 전쟁

 

탐욕을 위해 신의 이름을 판 십자군 전쟁

안녕하세요. 미쿡스트릿맨입니다.

오늘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신의 이름을 팔면서 200년 동안 전쟁을 치른 긴 전쟁이면서 가장 잔혹하게 기억되는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세시대는 암흑기라고도 표현될 만큼, 힘들었던 시기였지요. 특히 십자군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치르며 잔인하게 살육을 저지르고 재물을 취한 시건이었지요. 그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군은 도대체 왜 일어난 것일까?

 

십자군 전쟁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공인을 받은 원정대와 이슬람 군대 사이에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종교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사실 이 전쟁의 배경에는 종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요.  먼저 종교적인 이유를 들 수 있는데요. 십자군 전쟁의 가장 큰 명분은 이슬람교도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지요. 이슬람 국가인 셀주크튀르크에서 기독교의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막자,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우스 1세가 공격을 한 것이었죠. 그러나 결과는 대패하고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면서 바로 십자군 전쟁의 서막을 열게 되었지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것이 종교적인 이유뿐이었을까?

 

사실 교황이 십자군 전쟁을 승인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교황권 강화와 세력의 확대도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중요한 배경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목적 중 하나는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순례자들의 안전보장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목표는 동서 교회의 분열 이래로 분열되어 있던 동방교회 (정교회)와 서방교회 (가톨릭)를 통합하여 자신이 그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지중해 무역의 장악, 영주들의 새로운 영토와 영지의 확보 등 경제적 이익도 또 다른 이유이지요. 결과적으로 보면 십자군으로 인해 지중해의 상업과 교역이 번창,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해양 공화국들이 번영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전쟁은 종교,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중세 유럽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기독교의 지워지지 않는 흑역사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1차 십자군 전쟁

1차 십자군 전쟁1095년부터 1099년까지 이루어졌는데요.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지원을 요청한 대서 전쟁의 서막이 되었죠. 교황 우르바노 2세가 1095년에 클레르몽에서 열린 신교회 회의에서 바로 1차 십자군을 선포하였지요. 이때, 교황은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성지를 회복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요. 1099년에는 십자군이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하였고,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지요.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몇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지게 되었지요. 

 

2차 ~ 8차 십자군 전쟁

 

2차 십자군 전쟁 (1147 ~ 1148)

2차 십자군전쟁은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국가와 기독교 도시 등이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지요. 그러나 모술의 야타베그인 장기가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자 서유럽에서는 십자군 원정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원정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병력과 물자만 낭비한 대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3차 십자군 전쟁 (1189 ~ 1192)

3차 십자군전쟁은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 군주 살라딘에게 점령당하자, 그에 따라 성지를 탈환하고자 결성된 십자군이지요. 이 전쟁은 1189년부터 1192년까지 약 3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4차 십자군 전쟁 (1202 ~ 1204)

4차 십자군전쟁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촉구로 원래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기획되고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한 기독교의 십자군이었지요. 그러나 종교적·신앙적 동기보다는 세속적, 경제적 목적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여 이슬람이 아닌 동로마 제국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5차 십자군 전쟁 (1217 ~ 1221)

5차 십자군전쟁은 1차 이집트 원정이라고도 합니다. 결과는 대패하여 원정군은 괴멸하고 5차 십자군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6차 십자군 전쟁 (1228 ~ 1229)

6차 십자군전쟁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지원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전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7차 십자군 전쟁 (1248 ~ 1254)

7차 십자군전쟁은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주도하여 일으킨 전쟁이나 패배하여 루이 9세 포로가 되어 4년 만에 풀려났습니다.

8차 십자군 전쟁 (1270)

8차 십자군전쟁 (1270) 8차 십자군전쟁은 7차에 패한 루이 9세가 튀니지에서 십자군을 주도하던 중 사망으로 1년 만에 끝났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미친 영향

 

경제적 변화

 

십자군 전쟁은 유럽과 중동 사이의 무역과 상업을 자극하여 새로운 무역로의 개발과 그 경로를 따라 도시와 마을의 성장으로 이어졌는데요. 이러한 경제 성장은 또한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강력해진 새로운 계층의 상인과 상인의 출현으로 이어졌지요.

 

교황권의 몰락

 

십자군 전쟁은 교황권에 의해 소집된 십자군이 각 세력들 간의 이해타산이나 약한 결집력으로 번번이 실패한 전쟁이란 오명을 남겼는데요. 특히 제2차 십자군은 교황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십자군 원정 중 가장 성과가 없었지요. 교황권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죠,

 

이슬람 세력의 결집

 

십자군은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대립하던 다마스쿠스와 누르 앗 딘을 협력하게 만들어, 후에 누르 앗 딘이 다마스쿠스를 얻어 시리아를 통일하게 되어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간접적으로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의 변화

 

십자군 전쟁은 성지를 회복하고 기독교의 세력확장을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오히려 기독교의 신앙이 약화되면서 교회의 권위가 추락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중세시대의 몰락을 불러와 르네상스로의 발전을 할 수 있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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